딸램은 학교로 가장은 직장으로 출근하고 설거지, 빨래, 집안 정리도 대충 끝냈다. 여유롭게 커피도 내리고, 책상에 앉아 독서대에 책을 펼쳤다. 서너 걸음 떨어진 곳에는 폰을 충전하고 있다. 한창 책에 몰입이 되려는 찰나 폰의 진동음이 심상찮다. '055'로 시작하는 낯선 번호. 누구지?
"여보세요?"
"양*중학교 보건실입니다. 채* 어머니시죠?"
"네!"
"어머니 많이 놀랄 일은 아니고요, 문자 메시지로 사진 한 장 보냈는데 봐주시겠어요?"
가슴을 졸이며 메시지를 여니, 눈 밑 광대뼈 언저리에 피멍이든 딸램이 울상이 되어있다. 체육시간에 친구의 배드민턴 라켓에 맞아서 다쳤다고 한다. 문진을 해본 결과 큰 문제는 없어 보이지만 혹시 모르니 X-ray 촬영을 해보는 게 좋겠단다. 급히 주섬주섬 챙겨서 아이가 있는 학교로 갔다. 다행히 누르지 않으면 아프진 않다고 한다. 보건선생님께서 안내해 주시는 대로 정형외과를 찾아갔다. 접수를 하고 나니 먼저 키와 몸무게를 재어보자고 한다. 키를 재고 내려온 딸램이 갑자기 울먹이며 아프다고 한다. 딸램의 찔끔 눈물의 의미를 눈치 했다. 나는 모르는 척 의사 선생님과 상담 후 X-ray 촬영까지 했고, 그 결과 뼈에 이상이 있는 것 같진 않단다. 눈이 다치지 않았고, 뼈에 이상도 없다 하니 이만하길 천만다행이라며 안심했다.
사실 우리의 마음을 무겁게 한 것은 오늘의 사고보다 몇 달째 키재기를 미루며 내심 더 컸을 거라는 기대가 무너진 것이다. 나름 먹거리도 신경 쓰고 애썼지만 큰 소용이 닿지 못했다. 딸램이 또래보다 키가 작은 건 딸램의 잘못도 부모인 우리의 잘못도 아니다. 태아 때부터 작았고, 신생아 때도, 성장하면서도 항상 또래보다 작았다. 아주 어릴 때는 잘 먹이면 클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타고난 뱃골이 작은지 많이 먹지 않았다. 어쩌다 과하게 먹이면 토했다. 조금 먹고도 배가 부르다고 했다. 한약을 먹이면 먹성이 좋아진다고 해서 지어 먹였지만 큰 차이는 없었다. 그렇다고 성장주사를 맞는 건 딸램도 질색팔색이고, 나 또한 그 부작용을 책임질 수 없기에 내키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제는 받아들이는 수밖에.
돌아오는 길에 차 안에서 딸램에게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사람은 각자 다 다르게 타고나. 작은 사람, 큰 사람, 노래 부르기를 좋아하는 사람, 공부를 잘하는 사람, 운동을 잘하는 사람,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 제 각각 다 다르지. 나는 왜 저 친구처럼 키 크고 날씬하지 않냐고 부러워만 하고 있으면 내 인생을 버리는 시간이야. 전부다 쭉쭉빵빵 미남 미녀만 있는 세상은 얼마나 식상하겠어? 잘 난 사람 못난 사람 다 양하게 섞여 있어야 재밌지. 내가 작으면 작은 대로 수학을 못하면 못하는 대로, 대신 딸램은 공감 능력 좋고, 친구도 많고, 노래 부르고, 글쓰기 좋아하잖아. 잘하고. 책 많이 읽고 매일 글쓰기 하면 더 잘할 거고. 지금 있는 그대로 나를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이야. 나를 알고 그 상태에서 얼마나 재밌게 살아갈까 궁리하며 사는 거지. 장애를 갖고 태어나는 사람도 있는데 키 작은 것은 별거 아니지. 얼마든지 작아도 행복하게 살 수 있잖아. 키 크고, 날씬하고, 이쁘고, 공부도 잘하고, 노래도 잘하고, 리더십도 있는 친구 있지? 그런 친구가 자신만만하게 당당하게 사는 것은 당연하지. 그런데 뭔가 좀 부족하지만 당당하게 자신감 있게 살아가는 친구가 진짜 멋있더라. "
"맞아, 어떤 친구는 작아서 귀엽고 이쁘다고 부럽다는 친구도 있어."
학창 시절 열등감 덩어리였던 나를 생각하며 노파심에 이런저런 말들을 많이 했다. 딸램은 의외로 아주 밝게 화답한다.
저녁시간 내가 운영하는 전쌤수학에서 친구 두 명과 함께 수업받는 딸램. 내가 실수로 수학을 잘하는 친구에게 딸램의 문제집을 펼치며 과제를 내어주다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페이지를 펼치게 되었다.
"어머나~ 어쩌지? 채* 문제집이네?"
"괜찮아요. 나는 당당하니까."
"하하하"
엄지 척을 보여주었다.
"수학 감각이 조금 부족해도 학교 성적은 비슷하게 잘할 수 있어. 수학경시대회라면 차이가 날 수 있지만 학교 성적은 그렇지 않아. 일정 수준까지 도달하기만 하면 되니까. 감각 좋은 친구들이 한두 번 할 때 나는 다섯 번, 여섯 번 목표한 점수가 될 때까지 반복하면 되거든. 딸램은 좋아하는 국어를 더 잘하면 되지."
이런 말에도 딸램은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 이런 성격은 나를 닮지 않아 참 다행스럽고 감사하다.
지금 읽고 있는 책 <사피엔스>에서 이런 대목이 나온다.
"생물학에 따르면 인간은 '창조'되지 않았다. 진화했다. '평등'하게 진화하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 진화는 평등이 아니라 차이에 기반을 둔다."
너무나 수긍이 되는 말이라 나는 창조론자와는 거리가 멀고, 진화론자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럴수록 자기 인정이 되어야 삶이 더 자유로울 수 있다는 걸 확신했다. 어느 정도 인간 존재에 대한 스스로 납득할 만한 지식이 쌓이고, 생각이 정립된 상태에서 딸램에게 얘기해 줄 수 있어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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