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물생각

음식은 손맛이 아니라 기분 맛

맹물J 2024. 10. 22. 23:11

우리 집에서 통도사까지는 20분 거리다. 주변에 산 좋고, 물 좋고, 공기 좋은 곳이 지천으로 늘려있는데 온종일 집에만 머물기는 아깝다. 왠지 손해 보는 느낌마저 든다. 나보다는 가장이 더 그런 것 같다. 아침에 퇴근하는 가장이 집에 들어서자마자 얘기한다.
"통도사 근처에 충무김밥 맛집이 있다는 데 갈까?"
오늘은 또 점심을 뭘 먹나 고민이었는데 반가운 제안에 '콜!'을 외친다.  가장은 암막을 치고 두어 시간 자고, 나는 공부방에서 아이들 문제집 채점도 하고 책도 좀 읽고 나니 금세 점심시간이 된다.

가장이 야간근무를 하고 온 날은 언제나 운전은 내 몫이다. 이런 날은 사소한 일에도 예민하고, 사람 좋기로 소문난 그지만 피로 앞에서는 맥을 못 춘다. 길치인 나는 웬만한 길은 대부분 내비를 찍고 출발한다. 내비는 자꾸 대로로 안내하고, 가장은 둘러 가도 한적한 길로 가자고 한다. 가장의 안내를 따라가다 보니 왕복 2차선 도로 커브길에 큰 트럭이 길을 막고 서 있다. 운전석에 앉은 채로 손짓으로 중앙선을 넘어가라고 한다. '미친~' 가장이 화를 낸다. '아~ 오늘이 그날!' 이해하고 넘어간다.

우리의 목적지는 달*분식! 테이블 4개가 다닥다닥 붙어있는 작은 분식집. 한쪽 귀퉁이에서 직접 반죽을 밀고 있는 남사장님과 주방에서 분주하게 손을 움직이는 여사장님! 기다리고 앉아있는데 제법 시간이 오래 걸린다.
"너무 오래 걸리네요. 이런 분식집은 금방 금방 나오는 거 아닌가?"
출발할 때부터 배가 고팠고, 한적한 길로 둘러오느라 시간이 지체된 데다 은근히 짜증도 난다. 하릴없이 폰만 만지작 거리고 있는 그때, 주방에서 들려오는 작지만 집중하게 만드는 부부 사장님의 대화. 여사장님의 말씀은 정확히 들리지 않았지만 이어진 남사장님의 어금니를 깨문듯한 말씀
"또 성질 돋우는 얘기를 한다. 그냥 하라면 좀 그냥 하면 되지."
"...."
침묵하는 여사장님. 왠지 속으로 분을 삭이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이다.


칼국수랑 충무김밥


눌러쓴 두건 밑으로 희끗한 흰머리가 보이는, 점잖고 신사일 것 같은 첫인상을 깨는 사장님의 말투가 내내 신경이 써인다.  지쳐갈 무렵 나온 충무김밥과 칼국수 그릇을 비우고 계산을 하고 나왔다.
"아저씨와 아줌마가 싸우셨는지 쇠하네~"
"그러게. 소문만큼 맛있지 않던데요? 누구 데려오기는 좀 그래."
"그렇지? 간도 안 맞고. 아무래도 다투느라 신경을 못 쓴 거 같아."

음식은 손맛이 아니라 만드는 이의 기분 맛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3분 거리의 통도사 주차장으로 갔다. 통도사에는 멋진 산책길이 있지만 시간이 촉박하다. 십 분만 걷고 돌아 나오자며 '무풍한송로' 산책길로 들어섰다. 며칠 째 비가 와서 계곡물이 콸콸 시원하게 흐른다. 맨발 걷기를 하시는 분도 계신다. 평일 비 오는 날이라 붐비지 않아 좋다.

무풍한송로


우리의 보금자리 아파트로 돌아와 주차를 하고 걸어 나오니 진한 향내가 참 좋다. 어디서 나는가 두리번거리니 아직 천리향 있는 것도 몰랐냐며 가장이 가는 길을 돌린다. 우리가 걸어갈 방향과 약간 벗어나 있지만 굳이 둘러서 사진도 한 장 남긴다.


천리향


#달*분식 #통도사 #음식맛은기분맛 #천리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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