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야기

오로지 배고픈 것만이 진실

맹물J 2024. 10. 12. 19:44

오로지 배고픈 것만이 진실이고 그 밖의 것은 모조리 엄살이고 가짜라고 여겨질 정도로 나는 악에 받쳐 있었다.

박완서 님의 성장 소설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6.25 전쟁으로 서울 사람들이 모두 피난을 갈 때 박완서선생님의 가족은 피난을 떠나지 못한다. 오빠가 징병되어 갔다가 다리가 곪고 폐병 환자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대부분 피난민이 되어 빠져나간 서울이 진공상태가 되었을 때,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 빈집을 뒤진다. 그마저도 더 이상 먹을 것을 찾아낼 수 없을 때의 심정을 표현한 단락이다.


박완서 작가님


오늘 아침 어머님, 아버님을 모시고 서울 연세바른병원으로 왔다. 허리통증으로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되신 어머님께서 아버님이 협착증 수술을 하신 병원으로 가자고 하신 것이다. 웬만한 통증에는 아프다 하시는 법이 없는 분이, 직접 병원에 가자고 하실 때는 그 통증이 한계를 넘었다는 뜻이다. 오죽했으면 하는 마음에 두 말할 것이 없다. 구면인 원장님께 아버님께서 직접 전화를 걸어 예약을 해두셨다. 두 분만 보낼 수 없어 함께 나선 것이다. 원장님과 상담을 하고, MRI 촬영 후 시술을 받기로 했다. 시술은 간단히 끝났고, 2시간 정도 금식을 하며 안정을 취해야 한단다. 그때 아버님께서 10여 년 전 당신의 수술 이야기를 꺼내시며 친구분과 나눈 이야기를 하신다.
"허리 치료받는데 천만 원이 넘게 들었어요."
"낫기만 한다면 그깟 돈이야..."

그렇다. 인간이 가장 낮아지는 포인트는 생명을 이어가는데 필수요소인 식량이 없을 때와 피할 수 없는 육체적 고통이 있을 때가 아닐까 한다. 며칠 굶주린 상황에서 먹을 것을 얻을 수 있고, 극심한 통증에서 벗어나게 해 준다면 그 어떤 값진 것이라도 내놓지 못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이 두 지점이 인간의 가장 민낯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이 것을 해결할 수단을 쥐고 있는 사람이라면 돈방석에 앉을 수밖에 없다.

기후 위기로 전 세계 식량난이 발생하면 식량 자급률이 가장 낮은 우리나라가 제일 위험하다고 한다. 진심 현실이 될까 두렵다. 어머님은 당신이 아프면 자식에게 짐이 된다 하여 엄청 건강에 신경을 쓰시는 편이다. 외식도 거의 하지 않으시고, 건강한 집밥과 건강식품을 챙기시고 운동도 규칙적으로 하신다. 그런데도 세월 앞에 장사 없다고 노쇠로 인한 질병에는 어쩔 도리가 없다.  
세월의 흐름이 내 신체의 변화로도 느껴질 때 가장 두려운 부분이 이것이다. 그러면서 또 드는 생각은 그래서 그렇게 사람들이 의사 의사, 의대 의대 하는가 싶기도 하다. 나이를 먹을수록 병원을 찾는 횟수가 늘어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니까.  

시골에 있다 오랜만에 상경해서일까? 새벽 첫 기차를 타고 왔음에도 기차가 서울역에 도착하자 쏟아져내리는 사람들을 보면서 감탄이 절로 나온다. '역시 사람은 서울에 다 있구나. 지방은 소멸 위기라는데 사람이 없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서울에 다 있는 거였구나. 그중에서도 다수가 병원에. 노인일수록 더. 그러니 의사가 아무리 많아도 부족할 수밖에. 그러니 의사면허만 있으면 먹고살 걱정이 없겠구나.'

내려오는 KTX 안에서 온갖 상념들이 스친다. 저녁시간 길이 많이 막힐 것 같아 택시 대신 지하철이 낫겠다는 판단에 어머님, 아버님을 제법 걷게 만들었다. 예약이 늦어지는 바람에  다른 호차에 타고 계신 어머님, 아버님은 지금쯤 잠이 드셨을까? 많이 피곤하고 힘든 일정이었을 텐데. 어머님은 이 번 시술의 효과를 보시고 부디 편해지시기를. 그래도 어머님 옆에는 아버님이, 아버님 옆 자리에는 어머님이 항상 계시기에 든든하고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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