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야기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맹물J 2024. 2. 1. 14:29

이 나이에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이토록 진지하게 읽게 될 줄은 몰랐다. 초등학교, 중고등학교 때도 특별히 관심을 갖지 않았고 그저 외국인이 지어낸 이상한 이야기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만화로 잠깐잠깐 보긴 했어도 제대로 스토리도 기억나지 않을 만큼 건성으로 봤다. 재미있어 애써 본 것이 아니란 얘기다. 지극히 현실주의자인 나에게 상상력을 동원하는 스토리는 구미가 당기지 않았다.

그런데 이 번에는 달랐다. 물론 지금도 스스로는 절대로 선택하지 않았겠지만 독서모임 지정도서라 반강제로 읽혔다고 해야 맞겠다. 여전히 처음에는 흥미 있는 스토리는 아니었다. 다양한 출판사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중에 내가 선택한 이 책에는 중간중간 그림이 삽입되어 있다. 상상력이 부족한 나에게도 충분히 호기심을 자극할만하다. 그래서 그린 이를 찾아봤다. 이름이 '퍼엉Puuung'이다. 프랑스 사람인가?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애니메이션 예술전문사 학위를 받았단다. 추척해보니 어여쁜 한국 여성이고, '뻥~'하는 소리를 표현한 의성어를 따서 급히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아무튼 퍼엉식 앨리스 일러스트는 나의 무딘 감성을 자극하는 데 성공했다.


가벼운 맘으로 책을 읽어 나가다 낯익은 대화를 발견했다.

"부탁인데 내가 여기서 어디로 가야 할지 말해줄래?"
고양이가 대답했다.
"그건 네가 어디로 가고 싶은지에 달려 있지."
"어디든 상관은 없는데....."
"그럼 어느 쪽으로 가든 상관이 없겠네."

이쪽으로 가면 모자 장수, 저쪽으로 가면 3월 토끼. 둘 다 제정신이 아니니까 어느 쪽을 가든 별반 차이가 없을 거란 얘기다. 그런데 어디든 상관없다고 말하던 앨리스가 제정신이 아닌 사람들한테는 가고 싶지 않단다.

"뭐 먹을래?"
"아무거나..."
그래서 아무거나 음식을 주문해 주면 이건 싫단다.

우리 주변에는 의외로 '아무거나 상관없다'는 앨리스들이 참 많다. 긴 세월을 나도 앨리스로 살아왔다는 사실을 고백한다. 지금은 탈앨리스를 위해 의지적인 노력을 보인다. 짜장면, 짬뽕 아무거나 상관없다 싶을 때는 얼른 아무거나 내뱉고 본다든지 하는 식으로. 나를 세심하게 관찰해 보면 아무거나 상관없는 경우는 잘 없다. 50:50보다는 49:51인 경우가 더 많다는 말이다. 누구라도 앨리스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낭패를 본다. 그 의중은 '내 진심을, 내 입맛을 네가 맞춰봐. 실은 나도 내 마음을 꼭 집어 말하기 어렵거든. 네가 대신 내 취향에 꼭 맞는 것을 골라줘.'이다.
  
p.139
"이럴 시간에 다른 것을 하는 게 낫겠어요, 정답도 모르는 수수께끼를 묻는 데 그것을 낭비하느니 말이에요."
모자 장수가 말했다.
"네가 나만큼 시간을 잘 안다면 '그것'을 낭비한다고 하지 않을걸. '그'를 낭비한다고 하겠지."

p.146
"그런데 그 자매들은 왜 우물 바닥에서 살았어요?"
"차 좀 더 마셔."
3월 토끼가 진지하게 앨리스에게 말했다.
앨리스는 기분이 상해서 대답했다.
"저는 차 한잔도 안 마셨어요. 그러니 '더'마신 다는 건 말이 안 되죠."
모자  장수가 말했다.
"덜 마실 수 없다는 말이지. 전혀 안 마신 것보다 더 마시는 건 아주 쉽잖아."

P.162
"그들의 머리는 베었나?"
병사들은 씩씩하게 대답했다.
"목은 사라졌습니다. 여왕 폐하!"

그렇지 목은 베지 못했지만 그들이 도망갔으니 목은 사라진 것은 맞다.  병사들은 여왕에게 사실을 말했고, 여왕은 자의대로 해석을 했을 뿐이다. 그들의 목이 베어졌다고.

스토리 전체가 '수 없는 말장난의 연속'처럼 보인다. 그런데 나는 이런 말장난이 재미난다. 어릴 적 입 밖으로 내뱉진 못했지만 속으로만 쏟아냈던 말들을 책에서 다시 듣는 것 같아 공감 100배다. 학교에서는 선생님 말씀에, 집에서는 엄마, 아버지의 말씀과 언니, 오빠들의 얘기 속에서 나는 대꾸했다. 속으로. 때로는 그들의 이야기가 이해가 안 돼서, 때로는 10대의 눈높이에서 이해를 하고, 때로는 내 지식의 한계 속에서 퍼즐 맞추기를 하면서 의문을 가졌다. 번번이 그 속엣말을 내뱉었다면 분명히 머리에는 혹이 수십 개, 꽉 막히고 답답하고 멍충한 아이로 취급당했을 것이다. 가뜩이나 강압적인 집안 분위기 속에서 더더욱 안될 말이다. 어쨌거나 내가 경험했던 것보다 도를 넘어선 말장난에 속이 후련하다. 이런 말이 가능한 말인지 모르겠다. 말장난에 속이 후련하다니. 어쨌든 내 느낌은 소중하니까.

동음이의어를 이용한 말장난도 참 많다. 이 부분은 따로 정리해서 블로그에 올릴 생각이다. 우리말과 글도 그렇지만 영어에도 같은 발음 다른 뜻, 한 단어 두 가지 뜻 등등 언어의 유희를 즐길 거리가 많다. 이럴 때는 짧은 영어가 한탄스럽다. 할 수만 있다면 머지않은 때에 원서로 읽어보고 싶다.

이런 상상력 가득한 스토리는 나는 절대로 쓸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런 것도 연습하면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든다. 언어는 참 사랑스럽다.

#이상한나라의앨리스 #앨리스 #루이스캐럴지음 #퍼엉그림 #박혜원옮김 #말장난 #언어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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