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다. 아침을 먹고 느지막이 집을 나섰다. 볕이 따가워도 가을볕인데 어떠랴. 주말 가장의 출타로 하루 종일 땅을 못 밟아본지라 지기가 고픈 날이다. 운동화를 단단히 동여 매고, 반바지에 민소매티, 얇은 카디건을 걸치니 초가을 느낌이 살짝 난다. 상북면으로 이사를 오고는 바로 땡여름이라 낮시간에 걷는다는 건 엄두도 내지 못했다. 오랜만에 가을에 취해볼 각오를 하고 나섰다. 그래도 아직은 내리쬐는 햇볕이 달갑지만은 않다.
우리 아파트에서 나오면 처음에는 차도 옆 인도를 따라 걸어야 한다. 다행히 그 길이 길지 않고, 통행량도 많지 않아서 참을 만하다. 처음 와 본 길을 어찌 그리 잘 아는지 가장의 안내를 따라 걷다 보니 정말 제대로 된 산책길이 나온다. 먼저 콩과 빨간 고추가 익어가는 논밭이 보인다.
"이렇게 넓은 땅에 콩만 심어놓은 건 처음 보네요. 울 엄마는 콩은 논두렁에만 심었는데..."
"콩이 하나도 안 달렸는데 이게 콩이라고?"
"콩이 아직 익지 않아서 이파리 색이랑 비슷해서 그래요. 가까이 가서 보면 붙어있을걸요."
그래도 고개를 갸웃갸웃하던 도시남이 말한다.
"이 넓은 땅에 콩을 언제 다 따?"
"헉, 설마 허리 굽혀서 한 알 한 알 딴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져? 둥치채로 잘라서 멍석에 깔고 말리는 거예요. 마르면서 저절로 탁탁 알맹이가 튀어나오죠. 안 나오는 건 도리깨로 두드리면 나오고."
하긴 보지 않고 경험하지 않으면 어찌 알쏘냐. 노후에 전원생활을 꿈꾸는 가장을 얼마나 믿고 따라갈 수 있을지 살짝 의심이 드는 대목이다. 그랬거나 말거나 새로운 장소를 탐방하는 길잡이로는 손색없는 가장이다. 좀 더 걸어가니 양산천을 따라 자전거길이 나온다. 잘 정비된 길이라 깨끗하다. 강가 바위에 고고한 자태를 뽐내는 새 한 마리. 여기가 그의 집인지 잠시 마실을 나온 건지 모르겠다. 산책로 오른편으로는 조각가의 집이라고 한다. 카페 같은 개인 주택. 정말 조각가의 집답게 마당 곳곳에 조형물이 어우러져 마치 카페 같다. 한 집 더 건너 진짜 카페가 있다. 아침마다 습관적으로 마시는 커피를 못 마신 탓인지 급 끌리는 너른 카페. 차로 왔다면 따뜻한 커피를 주문했겠지만 망설임 없이 아아를 외치고 올라온 2층 카페는 우리를 위한 공간 같다. 넓디넓은 창으로 보이는 양산천의 풍경이 눈을 맑게 한다.




작은 바람에도 온몸을 흔들어대는 이름 모를 나무, 이 정도 바람이야 간지럽다는 듯 살짝 어깨만 으쓱해주고 마는 소나무. 바람결 따라 물결을 만들어내며 흐르는 강물. 그 물결 따라 사뿐히 떠 있는 저 멀리 오리 떼. 똑같은 환경에도 이리 다른 모습과 반응. 이 모든 게 다 괜찮다며 한 데 어우러져 조화를 만들어내는 자연은 참말 존경의 대상이다. 조화로움이라면 자연에 대적할 자가 있을까?

인간도 자연의 일분건만 인간이 만들어내는 불협화음은 뭐라 설명해야 할까? 이 불협화음조차 다양성으로 보고 포용하는 자연이련가? 분별하거나 판단하지 않는 자연! 그 위대함에 고개를 숙인다.
2024.10.1.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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