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근태 작가가 낭송하는 박경리선생님의 <산다는 것>이라는 시를 들었다. 시를 읊조리기 전 작가는 말한다.
"잘 산다는 것을 어떻게 정의하십니까?"
"제가 생각하는 잘 사는 것은요. 생긴 대로 사는 것. 이것이 잘 사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을 늘 잘 관찰하는 것이 중요하죠."
산다는 것
박경리
체하면
바늘로 손톱 밑 찔러서 피 내고
감기 들면
바쁜 듯이 뜰 안을 왔다 갔다
상처 나면
소독하고 밴드 하나 붙이고
정말 병원에는 가기 싫었다
약도 죽어라 안 먹었다
인명재천
나를 달래는 데
그보다 더 생광스런 말이 또 있었을까
팔십이 가까워지고 어느 날부터
아침마다 나는
혈압약을 꼬박꼬박 먹게 되었다
어쩐지 민망하고 부끄러웠다
허리를 다쳐서 입원했을 때
발견이 된 고혈압인데
모르고 지냈으면
그럭저럭 세월이 갔을까
눈도 한쪽은 백내장이라 수술했고
다른 한쪽은
치유가 안 된다는 황반 뭐라는 병
초점이 맞지 않아서
곧잘 비틀거린다
하지만 억울한 것 하나도 없다
남보다 더 살았으니 당연하지
속박과 가난의 세월
그렇게도 많은 눈물 흘렸건만
청춘은 너무나 짧고 아름다웠다
잔잔해진 눈으로 뒤돌아보는
청춘은 너무나 짧고 아름다웠다
젊은 날에는 왜 그것이 보이지 않았을까
'청춘은 짧고 아름다웠다. 젊은 시절에는 왜 그것이 보이지 않았을까?'
그것을 보고 있는 지금!
그것을 보고 있는 지금이라 그 짧고 아름다웠던 청춘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아 짧긴 했으나 내 청춘이 아름다웠는지는 모르겠다. 무언가를 인식한다는 것. 특히 스스로를 안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몰랐다. 나를 세심하게 관찰하기보다는 의식은 항상 외부를 향해 있었다. 센스 있는 엄마들이 구입해 줬을 법한, 브랜드 로고가 박힌 친구들의 옷차림, 자취하는 내 것과 비교되는 친구들의 도시락, 친구들의 말 한마디, 친구들의 필기구, 친구들의 성적과 비교하기, 선생님의 말씀과 눈길.... 지금 생각하면 이 중에 무엇이 중요했을까?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내가 무엇을 잘하는지?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자립을 위해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부모님의 불화, 가정 형편, 외모 이런 것에 위축될 것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더 집중하고 자신에게 더 친절하고 자신을 더 사랑해야 마땅했다. 이제라도 이것을 잘 알고 있는 지금이, 나 자신과 가족에게 집중하고 있는 내가 좋다. 앞으로 남은 50년이 더 아름다우리란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아 근데 이 시에 나에게는 낯선 표현이 있다. '생광스런'! 네**에 찾아보니 '아쉬운 때 요긴하게 쓰게 되어 보람 있다'는 뜻인 것 같다. 언젠가 나도 '생광'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며 생광스럽게 쓰게 될지도 모르겠다.
#박경리 #한근태 #맹물 #산다는것 #잘산다는것 #생긴대로사는것 #나에게집중 #생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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