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물생각

호박의 변신

맹물J 2024. 12. 3. 08:01

"주말에 어머님댁에 갈 때 뭘 좀 사갈까요?"
"호박떡 만들어 갈까?"
얼마 전 친정에서 가져온 누런 호박이 덩그마니 진열장에 놓여 있었다. 아버님께서 가장 좋아하는 떡이 호박우거지가 듬뿍 들어간 호박백설기이다. 그걸 흉내 내어 보겠다는 가장을 말리며 한마디 했다.
"호박떡에는 호박 말린 게 들어가지 생호박은 수분이 많아서 안 돼요."

가장은 명절마다 큰 시누이 떡집에서 떡일을 도우면서 어깨너머로 배운 솜씨로 서당개 풍월 읊듯이 정말 떡을 만들 태세다. 호박죽을 좋아하지만 큰 호박을 쪼개서 소분하는 게 엄두가 나지 않아 관상용으로만 보고 있던 참이라 잘되었다 싶은 마음도 있다.

수업을 마치고 돌아보니 정말 커다란 호박의 형체는 사라지고 없다. 큰 웍에 익혀서 뭉개진 호박, 말리겠다며 토막토막 얇게 썰어놓은 호박, 못 다 다음 어진 것은 냉장고에서 숨 고르기 중. 갖가지 모습을 한 호박에 한 번 놀라고, 완벽하진 않지만 해체 과정을 엿볼 수 없게 정리된 주방에 놀랐다. 그러나 정작 떡을 만들고자 하니 이것저것 요구 사항이 많다.
"면포 어딨 소?"
"찹쌀가루는?"
"반죽할 볼이 너무 작은데?"
"땅콩은? 땅콩 삶을 냄비가 안 보이네?"
"다른 콩은 없소?"
살짜기 짜증이 묻어나고, 괜히 음성이 높아진다.
"기차 화통을 삶아 먹었소? 왜 이렇게 목소리가 커요?"
"환풍기 소리 때문에 잘 못 듣는 거 같아서 크게 한 거죠."
이것도 영 틀린 말은 아니긴 하다.

가장은 찹쌀가루에 으깨진 호박 몇 국자를 떠 넣고 반죽을 해서 떡을 찌고, 나는 옆에서 남은 호박으로 호박죽을 만들었다. 그 옆에 나박나박 얇게 썰어놓은 호박에는 소금을 뿌렸다고 한다. 그렇게 하면 곰팡이가 슬지 않고 말릴 수 있을 것 같아서란다.
"유뷰브에서 봤어요?"
"아니, 내 생각에"

믿는 자에게 복이 있다고 하였으니 믿어 보려 한다. 여차하면 호박죽 2탄이 탄생할지도 모르지만 일단은 가장의 말을 따르기로 한다.

호박 베이스 모듬떡
완성으로 가는 중인 호박죽
소금 뿌린 호박

아침에 일어나니 굳히고 있던 떡은 봉지봉지 포장되어 냉동고에 들어가 있고, 소쿠리에 담긴 호박은 베란다 비닐 위에 흩뿌러져 있다. 빛깔이 참 고맙다. 호박이 노랗다 못해 찐주황으로 붉어지고 있다. 주말에 아버님께 갖다 드리면 반가워하시겠지. 좋아하시는 호박설기는 아니라도 아들의 노고를 알아주실 것이다.

가장표 호박모듬떡
베란다에 말리는 중

호박! 어찌 된 영문인지 좋은 어감으로 쓰이지 않는 단어가 되어 있다. 이렇게 갖가지 모습으로 변화해 가며 우리에게 유익함을 제공하는 이가 왜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는지 모르겠다. 원래 그대로 골져 있는 모양도 이쁘고, 잘라놓으면 이렇게 색깔도 사랑스럽고, 호박죽, 호박떡 등 쓰임도 다양하고, 건강에는 얼마나 보탬이 되는가. 이뻐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데 말이다. 오늘부로 이런 호박을 더 사랑하기로 맘먹는다. 다음에 친정에 가면 누렁이 한 덩이를 더 갖고 와도 되겠다. 가장을 믿고.

#호박 #호박떡 #호박죽 #친정 #누렁이 #호박설기 #호박모듬떡

반응형

'맹물생각' 카테고리의 다른 글

큰올케언니 환갑  (0) 2024.12.02
상하북종합사회복지관 작은 도서관  (1) 2024.11.27
가을 가을 가을  (1) 2024.11.26
아이폰 16 프로  (0) 2024.11.25
구관이 명관이다  (1) 2024.1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