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야기

쌈채소

맹물J 2024. 10. 18. 23:11

<소금북> 독서 모임에 잠깐 참여하셨던 혜림 쌤이 책을 내셨다. 아기자기 생활 속의 다양한 물건들이 그림의 소재가 된다. 페이지마다 쌤과 제자들이 직접 그린 그림과 관련 설명이나 사연을 간략히 쓰셨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생활 속 친숙한 물건들을 편안하고 부드러운 터치로 담아낸 그림에 마음이 보들보들해진다. 책을 받자마자 후루룩 넘기는데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그림 한 장! 내가 좋아하는 쌈 쌔소를 실감 나게 그리기도 했지만  함께 실린 글에 공감백배다.

"살 때는 열심히 출고일자를 살피고는
사고 나서는 바쁘다는 핑계로
냉장고에 방치되어 있는 쌈채소"

마트에서 장을 볼 때마다 유통기한을 열심히 살핀다. 특히 채소, 과일, 계란, 우유, 생선, 육류 등을 선택할 때는 더욱 예민하게 군다.  하루라도 최근에 포장된 것을 찾기 위해 손 닿기 쉬운 제품은 다 물리치고, 냉장고 깊숙이 손을 짚어넣기도 한다. 그런데 막상 집 냉장고에서는 종종 물러진 채소들이 퇴출된다. 분명 입장 시에는 이러하지 않았거늘. 그렇게 전투적으로 포장날짜와 사투를 벌인 것이 무색하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기억력 저하를 제대로 실감하는 때가 이 때다. 마트에서 싱싱하고 먹음직스러운 자태에 반해 욕심스럽게 이것저것 담아 온다. '오늘은 바쁘니까 잠시 냉장고에 있어.' 상냥한 마음이지만 억새고 바쁜 손놀림에 야채들이 화들짝 놀랬을지도 모른다. 그러거나 말거나 냉장고 문이 닫기는 순간 내 머릿속에 그들의 자리는 없다. 오늘 저녁식사는 바쁘니까 어제 만들어둔 반찬들로 가볍게 떼운다. 내일은 어쩌다 보니 외식 스케줄이 잡혔다. 모레는 가장이 회식이라 저녁을 먹고 온단다. 딸램이 오늘 같은 날은 특별히 떡볶이를 먹자고 한다. 그 다음날 문득 생각난  깻잎, 팽이버섯, 콩나물, 호박, 오이 등등. 야간 근무를 마치고 온 가장에게 묻는다.
"점심 뭐 먹을래요?"
"가볍게 라면 무까?"

라면을 라멘으로 만들어야 하나? 머리로는 냉장고 야채칸을 스캔한다. 라면에 콩나물을 넣고, 파 대신 깻잎을 넣어본다. 가족을 위해 한 몸 기꺼이 희생하고 돌아온 가장에게 기껏  라면을 차려 냈다는 죄책감을 더는 데 약간의 보탬이 되어준다. 그러나 앞으로는 냉장고 속 식품들을 항상 주시하리라 다짐해 본다.

#쌈채소 #혜림쌤의그림일기 #유통기한 #유효기한 #냉장고야채칸 #채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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