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가장이 쉴 수 있는 날이라 1박 2일 전라도 광양, 여수를 다녀왔다. 2주 전 광양에 갔다가 매화만 보고 동백꽃을 보지 못했던 것이 못내 아쉬웠던 모양이다. 광양까지 가서 동백꽃만 보기는 아깝다며 이웃 동네 여수까지 1박 2일이 되어버렸다. 어른들도 연이어 피곤하시지 않겠느냐 걱정했지만 기우일 뿐임을 알았다. 너무나 기쁜 모습으로 나서시는 부모님들을 보면서 여건만 된다면 여행은 언제나 즐거운 것임을 확인하는 시간이 되었다.
2024년 3월 16~17일 1박 2일 여행코스 중 첫날은 광양 운암사를 통해 바로 걸어갈 수 있는 옥룡사지 동백나무 숲을 구경한다. 바로 이어 배알도 수변 공원으로 가서 배알도의 '별 헤는 다리'를 건너 정병욱생가를 방문한다. 시간이 허락된다면 망덕산까지 오르는 것이다.
운암사를 들어서는 입구부터 심상찮은 거대 불상이 보인다. 40m 높이의 동양 최대 청동약사여래불(중생이 질병을 치료하고 재앙을 없애준다)이 있는 사찰이다. 왠지 새삥이라 생각했더니 1990년대 중반 종견스님이 옛 운암사 자리라 추정되는 곳에 사찰을 지어 사세를 확장하고 있다고 한다. 운암사는 옥룡사를 창건한 도선국사가 비보사찰(땅의 기운이 쇠하는 곳에 사찰과 탑을 세워 인위적으로 땅의 기운을 보완한다)로 지은 절이다.
우리의 목적지인 동백나무 1만 그루가 장관을 이룬다는 동백나무 숲이 자리한 옥룡사는 현재 소실되고 절터만 남아 옥룡사지로 불린다. 옥룡사는 864년에 통일신라의 승려이자 풍수지리설의 대가로 알려진 도선국사가 창건하여 35년 동안 수백 명을 제자를 기르고 입적한 곳이다. 그러나 1878년(고종 15)에 화재가 나서 천년 이상 밝혔던 법등은 꺼지고 말았다. 그나마 남아있던 도선국사와 수제자의 부도탑과 비석마저도 일제강점기 때 이 일대가 청주한씨 문중으로 매입되면서 흔적을 잃었다고 한다. 1990년대에 이르러 순천대학교박물관에서 여러 차례 조사를 실시하여 발굴된 자료로 현재의 모습 정도로 복원되었다.
도선국사가 창건 당시 땅기운 약한 것을 보하기 위하여 주변에 동백나무를 심어 번식시켰다고 한다. 그러니 1000년 이상된 동백나무 숲이 되겠다. 동백나무 수명이 얼마인지 모르겠으나 그 긴 세월 동안 나고, 자라고, 자손을 퍼뜨리고, 죽기를 반복해서 세월이 만들어낸 자연의 힘이다. 너른 터 주변으로 동백나무가 빽빽하다. 7000~1만 그루 정도된다고 한다. 일주일 뒤가 동백축제라는데 이제 겨우 봉우리가 터지고 있다. 옥룡사지 둘레가 붉게 물든 것을 상상하면서 달려왔는데 많이 아쉽다.
그래도 따땃한 햇볕이 초봄의 한기를 데워주어 즐거운 소풍이다. 아직 춥다는 엄마와 벌써 덥다는 딸램! 모두의 만족을 위해 잎이 거의 없는 그러나 잔가지가 무성한 나무 그늘 아래 자리를 마련했다. 가지 사이사이 들어오는 햇볕은 엄마인 나를 위해, 거미줄처럼 엉킨 나뭇가지가 만드는 그늘은 딸램을 위해 탁월한 선택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준비한 치아바타샌드위치를 극찬하며 드시는 아버님! 그것만으로 당신의 행복한 여행 준비의 시작과 끝으로 충분하다.
활짝 핀 동백을 보지 못한 아쉬움은 가장과 딸램이 만든 딸기동백으로 위안을 삼는다.
옥룡사지 뜰에는 옥룡사의 유래라 해야 할지 전설이라 해야 할지 모를 스토리가 20여 장 포스트로 제작되어 있다. 그 앞에서 지루함을 달래고 있는 딸램 한컷.
포스터 아래로 소망의 샘이 있다. 이 소망의 샘에서 노무현대통령이 물 한 바가지를 마시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고 한다. 우리도 놓칠 수 없어 각자 소원을 담아 한 바가지씩 원샷. 포스터에서 이 물에 눈을 씻고, 마셨더니 눈병이 다 나았다는 글을 뒤늦게 보시고 한 번 더 언덕을 내려가는 수고로움을 감수하신 어머님 얘기는 안비밀이다.
아 중요한 사실 하나. 옥룡사지는 국가사적 제407호, 동나 나무 숲은 천연기념물 제489호로 지정되어 있다. 동백꽃의 꽃말은 '그대를 누구보다 사랑합니다.'이다.
다시 30분을 달려 다음 코스인 배알도수변공원에 도착했다. 여행을 떠나오기 전 딸램이 배알도에 대해 공부한 내용을 A4용지로 정리해 놓은 것이 여러모로 도움이 된다. 그 자료에 의하면 배알도는 망덕산을 향해 절을 하고 있는 형상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아래 사진에서 왼쪽 망덕포구와 이어진 '별 헤는 다리'는 윤동주 시인의 '별 헤는 밤'에서 모티브로 탄생한 것이다. 국내 최초로 곡선 램프를 도입한 현수교식 해상보도교이다. 아래 사진에서 오른쪽 다리를 걸어 배알도에 들어서면 부산의 을숙도처럼 바닷물과 섬진강물이 만나는 진풍경을 보게 된다.
아래 사진에서 가운데 바닷물과 강물이 만나는 경계가 보인다.
'강물은 흘러갑니다~
바다로 쉬지 않고 바다로 흘러만 갑니다.'
혜은이의 노래가 엉터리 가사로 마구 떠오른다.
유행가 가사에는 자연이, 인간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명리학자 박청화선생님이 강의 중간중간마다 유행가를 읊조리는 마음이 이해가 된다.
배알도 풍경을 구경하고 '별 헤는 다리'를 걸어가면서 광양에서 갑자기 왜 윤동주 시인을 조우한단 말인가. 전날 딸램의 설명을 듣지 못했다면 참으로 의아했을 것이다. 물론 다리 이름부터 뭔가 수상하긴 하다. 사연인즉슨 윤동주시인이 연희전문(현 연세대학교)에 다니던 시절 후배인 정병욱과 하숙을 함께 하며 "마음을 주고받는 글벗"으로서 지냈다고 한다. 윤동주는 졸업 즈음 손수 작성한 자선시집을 정병욱에게 증정한다. 이후 일본으로 유학을 간 윤동주는 독립운동 혐의로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1945년 2월 16일, 29세 젊은 나이로 순절하게 된다. 연희전문을 졸업한 정병욱도 1944년 1월 일본군에 끌려가게 되자 어머니에게 윤동주의 유고 보존을 부탁한다. 광양망덕포구에서 주조장을 운영하던 정병욱의 어머니는 주조장의 마룻바닥을 뜯어내고 그 시집을 항아리에 담아 7년간을 보관하셨다고 한다. 그 육필원고는 3권이 있었지만 정병욱에게 전달된 시집만 무사히 보관되어 광복 이후 유고 31편을 묶어 간행하기에 이른다. 그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이다. 아래 사진에서 빨간 지붕이 윤동주 시가 보관되었던 주조장이다.
벗 윤동주의 시를 보존하고 민족 시인으로 추앙받게 하는데 헌신했던 정병욱선생은 서울대학교 교수(1957~82) 및 박물관장을 역임한 국문학자이다.
"동주의 노래는 이 땅의 방방곡곡에 메아리치지 않는 곳이 없게 되었으니 동주는 죽지 않았다고 할 것이다. (...)
내가 평생 해낸 일 가운데 가장 보람 있고 자랑스러운 일이 무엇이냐고 묻는 이가 있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동주의 시를 간직했다가 세상에 알려 줄 수 있게 한 일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별 헤는 다리'에서 정병욱 생가가 있던 자리까지 오는 길 펜스에는 윤동주 시인의 시구들로 채워져 있다.
이미 세상에 없으나 이름을 남긴 위대한 스승들의 사연을 알고 나니 경건한 마음마저 든다. 그 와중에도 지금을 사는 자는 작은 아픔조차 참지 못하는 발과 다리의 절규, 위장의 아우성을 무시할 수 없다. 강변인지 해변인지 모를 길을 걸어가면서 보이는 벤치마다 앉고 싶어 하는 눈치인 어머님, 아버님을 보면서 망덕산은 패스하기로 했다.
미리 숙소를 예약하고, 맛집까지 알아둔 가장 덕분에 만족스런 저녁식사를 했다. 숙소 베이원파크 근처 갈치구이집 '웅천부일식당'으로 고고! 바닷가 출신이신 아버님, 어머님, 가장이 아주 흡족해하는 모습을 보니 과연 맛집은 맛집인가 보다. 외식하면서 이렇게 간이 슴슴한 집은 간만이다. 그럼에도 맛있다니 엄지 척. 아버님은 사이드메뉴인 양념게장에, 어머님은 물김치에, 가장은 고등어, 갈치구이에, 딸램은 고등어구이, 나는 갈치조림에 한 표씩 던졌다.
에어비앤비를 통해 예약한 숙소인 베이원파크 322호도 별점 5점 만점을 주고 싶다. 마치 주인이 직접 살다가 살림살이는 모두 깨끗이 정돈해 두고 몸만 빠져나간 것처럼 세심한 살림살이들이 깨끗하게 잘 구비되어 있다. 무엇보다 화장실이 1.5개! 양변기, 샤워실과 별개로 세면대가 있어 동시에 사용하기가 참 좋다.
냉장고에는 티백이 아닌 각종 건강한 차들이 있어 따뜻한 차 마시기를 좋아하는 나는 대만족이다.
아침식사는 팥죽을 좋아하시는 아버님을 위해 단팥죽을 준비했다. 주문한 지 거의 1달 만에 도착한 두유기 사용법도 알려드릴 겸 두유기로 콩대신 팥으로, 물을 적게 잡고 했더니 뻑뻑한 팥죽이 만들어진다. 여기에 소금을 소소 뿌리고, 아가씨네 떡집에서 공수해 준 인절미를 썰어 넣었더니 환상이다. 사실 환상까지는 못되고, 소금을 너무 많이 넣는 바람에 실패에 가깝다. 그래도 삶은 계란이랑 먹으니 간이 딱 맞다며 절대로 타박하는 일이 없으신 어머님, 아버님! 어쩐 일인지 삶아온 계란도 아주 자유롭게 찌그러지고 깨져서 민망하기 이를 데 없다.
아궁 1박 2일 일정을 한편으로 끝내려고 했더니 생각보다 쉽지 않다. 여수 편 오동도는 다음 편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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